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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존귀하신 하느님 아버지,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립니다. 이 글이 아직도 주(예수)님을 모르시는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귀한 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글 머리에 : 1. '하느님' vs '하나님'

    옛날에 한 역적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그 역적이 역적인 줄을 모르고, 대대로 그 역적을 자기들의 임금님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진짜 임금님이 나타나셔서 당신께서 진짜 임금님이시고, 지금까지 임금 노릇하던 사람은 역적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새로 나타나신 진짜 임금님에 대한 호칭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논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역적을 '임금님'이라고 불러 왔으니, 진짜 임금님께는 '임금님'이란 호칭이 적절치 못하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임금님을 '임금님'이라 부르지 말고, '임감님'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도적질 당했던 이름, 역적인 줄 모르고 잘못 사용했던 이름, 그 이름 '임금님'을 진짜 임금님께 돌려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치가 이러한데도, 억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란 호칭이 진짜 하느님께는 적절치 못하니, 우리는 우리 하느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것도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므로, '하나님', '둘님', '셋님', '넷님' 중에서 '하나님'을  채택하는 것이 옳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하느님'이시지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참고 1) '하나님'은 '하느님'의 평안도 사투리로서,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시던 외국 선교사님들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사투리를 그대로 잘못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 2)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의 범신론적인 하느님과 기독교의 하느님을 구별할 필요가 있으므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외국의 경우를 봅시다. 영어권에서는 'god'과 'God'이 비록 대소문자 구별은 있으나 발음이 꼭같고, 독일어에서는 둘 다 'der Gott', 일본어에서는 둘 다 '가미사마'임을 생각해 보면, 정말 엉터리 같은 주장을 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 머리에 : 2. '침례' vs '세례'

    침례는 침례자 요한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침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칠 때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침례자 요한에게 가셔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 교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침례는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신약 교회 시대에도 침례는 계속 행해졌습니다. 굳이 성경에서 그 예를 찾자면,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를 살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관으로서 마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마차에는 마실 물이 충분히 실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약식 적수 세례도 무방하다면, 빌립은 더 멀리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마차를 세우고, 마차에 실려 있는 마실 물을 조금 취하여, 여행 중인 사람을 번거럽게 하지 않고, 그냥 간단히 약식 세례 방식으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물 있는 데까지 가서, 마차를 세우고 물에 내려 가, 거기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그대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애논이란 곳에 물이 많아서, 거기서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는 기사도 성경에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침례가 옳고, 세례나 천주교의 영세는 비성경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침례에는 씻는다는 의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침례 받는 사람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 오는 것은,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장차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귀한 예식을 번거럽다는 이유로 간단히 해치우는 것은 실로 망령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참고 1) 약식 세례는 생명이 위독한 중환자들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도입된 것입니다만, 천주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되었을 때, 로마 제국의 고관대작들에게도 침례를 베풀어야 할 판인데, 그토록 귀한 분들을 물 속에 담그자니 인간적으로 차마 못할 일이라, 고민 끝에 궁여지책으로 중환자에게 행하던 약식 세례를 원용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겸손히 침례를 받으신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황제가 무엇이고 고관대작이 무엇이관대, 그들이 예수님보다 더 귀하단 말입니까?

(참고 2) 침례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에게만 베푸는 것이 합당한 바, 아직 믿음이 전혀 없는 철부지 유아들에게 유아 세례나 유아 영세를 베푸는 일은 영적 겁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망령된 짓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선''악'에 대하여

    하느님은 선 그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심판권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게만 있다. 따라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선악을 심판할 수 없다. 하느님은 심판주이시다. 어느 누가 감히 하느님을 피고인 자리에 세워 놓고 심판하는 재판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불완전한 인간인 양 착각하고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자기의 어설픈 선악관이나 가치 기준으로 심판하려 덤벼드는 불경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을 심판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선악을 심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의 선악을 심판하시는 기준도 하느님만이 정하실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이 선하므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를 '절대선'이라 함)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악(이를 '절대악'이라 함)이다. 반면에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선악관이나 가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할 때, 이 때의 선은 '상대선'이라 하고 악은 '상대악'이라고 한다. (참고 : 성경에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는 말씀과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는 말씀이 있음.) 덧붙이자면, 불신자가 회개하고, "하느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에 '죄인'이라는 말은 '원죄'와 '자범죄'가 있는 죄인을 의미하는데, 이 때 자범죄 부분에서 '때로는 선도 행하고 때로는 악도 행한, 다시 말해 전적으로 선만 행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에서의 죄인이 아니라, 자기가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전적으로 오로지 악만 행했다'는 의미에서의 죄인을 뜻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선악의 문제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충신이라고 자처하는 자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충절을 지킴으로써 자기의 이름을 만세에 길이 남기고자 죽음의 길을 택했다면,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대단한 선행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그 동기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 보시기에는 결코 선이 될 수 없음을 통찰해야 할 것이다.

2. '자유 의지'에 대하여

    신학에서 다루는 '자유 의지''영적 자유 의지'를 의미하고, 개인이 자기의 마음대로 행하고 싶은 의지('자율 의지')와는 다르다. 이렇게 용어를 구별하여 정의해 놓고 출발해야 다음의 이야기를 헷갈리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락하기 전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계셨으나, 타락한 후 그 분들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모두 '자율 의지'는 있지만, '자유 의지'는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참고 : 침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태중에서도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에 예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유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유 의지'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정하신 '선'(이를 '절대선'이라 함) 또는 '악'(이를 '절대악'이라 함)을 어느 것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말한다. 그런데, 타락한 우리 인간은 출생 후부터 성령으로 거듭나기(이를 '중생'이라 함)까지는 어느 누구도 '절대선'은 도무지 행할 수 없고, 오로지 '절대악'만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 의지'는 없는 것이다. (참고 :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생하기 전의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에라스무스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여 그 당시 교황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나, 성경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상고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옳음을 알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자율 의지는 있으나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을 좀 더 쉽게 풀어 보면, 중생하기 전의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의 자율 의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절대악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절대악의 영역 안에서만 놀도록 갇혀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의 경우나 중생한 성도의 경우에는, 절대악의 영역에 갇혀 있지 않고 자율 의지로써 절대선의 영역과 절대악의 영역 모두에서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의지가 자유롭다' 또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하기 전의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은 인간에게 성경을 주어서 읽게 하거나 복음을 들려주어도,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자기 스스로는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고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 하면, 의지가 절대악의 영역에 갇혀 있어서 절대선의 영역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복음을 듣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는 일은 성령님의 사역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인 것이다. (참고 : 펠라기우스는 성령님의 사역 없이도 인간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뜨거운 논쟁 끝에 결국 이단으로 결정되었는데 이것을 '펠라기우스 이단'이라 한다. 그 후에 아르미니우스도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으나 역시 오류로 배격되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언 신학에서는 하느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소위 '선행 은총'이라는 것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복음을 들으면 그것을 믿을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주장이다. 그러므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으면 믿게 되겠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자기 스스로는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은 왜 그렇게 고집이 세냐?' 또는 '당신은 왜 그렇게 머리가 나쁘냐?'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가 하느님 앞에서 무죄하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 하면, 자기 스스로 복음을 믿을 능력이 없게 된 것이 하느님 탓이 아니라 범죄한 원조 탓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원죄를 물려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원조의 죄는 원조의 죄지 그것을 왜 내가 물려 받아야 하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으나, 부모의 유산을 자식들이 물려 받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은 이치로 원죄는 후손들에게 대대로 유전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죄한 상태로 태어나서 그 후에 죄를 지음으로 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범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3. '삼위 일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본질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성부, 성자, 성령)로 계시는데 이것을 삼위 일체라 한다. 삼위 일체의 신비는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또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로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오직 믿음으로써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이다. 삼위 일체의 신비를 알기 쉽게 설명해 보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으나 오류를 범하게 된 경우도 그만큼 많았다. 비근한 예로서 '양태설'과 '역할설'을 들 수 있는데, 양태설은 물이 온도에 따라서 얼음과 물과 수증기로 변하는 현상을 가지고 삼위 일체를 설명한 것이고, 역할설은 한 목사님이 교회에서는 목사님, 가정에서는 가장, 신학대학에서 강의하실 때에는 교수님 등등, 이렇듯이 한 사람이지만 그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불리는 점에 착안하여 삼위 일체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잘못된 설명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유일신' 사상이 아닌 '삼신설'은 특히 경계해야 하는 이단 교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삼위 일체는 오직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만 있는 신비한 고유 속성으로서, 그 유비가 피조 세계에는 없다.

(참고 1)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의 경우에는 유일신을 믿지만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자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음을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사죄의 은총'과 성령 하느님께서 믿는 자의 심령에 내주하심으로 늘 함께 해 주시는 '내주 동행의 은혜' 내지는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다가, 사후에는 죄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불교도나 힌두교도 등의 경우에는 삼위 일체는 고사하고 유일신이신 창조주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갖은 고행을 마다 않고, 도를 닦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사후의 영벌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고 2) 천주교에서 믿고 있는 하느님도 삼위 일체라고 하나, 천주교의 하느님은 구약 46권, 신약 27권, 총 73권으로 계시된 신이므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의 성경으로써 당신을 친히 계시해 주신 진짜 하느님과는 다른 가짜(사신)임을 지적해 둔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천주교의 하느님은 계시된 신이 아니라, '성서'라고 불리는 73권으로 된 책과 '성전'이라고 하는 자료들을 토대로, 천주교 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최종적으로 교황에 의하여 인정된 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구약이 46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구약이 39권만인데도, 성경이 아닌 외경 7권을 '제2경전'이라 하여 구약에 추가하고서 외경도 성경으로 간주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중대한 오류로서 천주교가 기독교가 아닌 첫 번째 이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천주교의 성부/성자는 그 이름마저도 기독교의 성부/성자의 이름(야웨, 야훼, 여호와 / 예수)과 각각 같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우므로 주의를 요한다. 사람의 경우로 치면 동명이인이라고나 할까?

4. '영적 존재'에 대하여

    영적 존재는 크게 2종류(작게는 4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창조주이신 성삼위 하느님이 계시고, 둘째는 3종류의 피조물로서 이에는 천사들과 타락한 천사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영혼들이 포함된다. 천사들은 경우에 따라서 천군 천사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성경에 그 이름이 명시된 천사는 천사장인 미가엘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한 가브리엘 천사가 있다. 타락한 천사들은 사단, 마귀, 귀신, 악령, 악마 등으로 불리는데 성경에 그 이름이 명시된 것은 루시퍼, 바알세불 등이 있다. 여기에서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귀신이 된다'고 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중대 오류이다. 왜냐 하면, 성경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성도의 경우에는 낙원(천국)에 가 있게 되고, 불신자의 경우에는 음부(지옥)에 내려가 있게 된다는 것이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참조 :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경우). 다시 말하거니와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영계를 떠다닌다거나 원귀가 되어 구천을 맴돈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아울러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설'도 오류임을 지적해 둔다.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면, 연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만약에 연옥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네 죄가 중하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바로 갈 수는 없고, 먼저 연옥에 가서 거기서 네 죄에 대한 보속을 해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1) 무속인들과 불신자들은 물론 기독교 계통의 몇몇 이단 종파들에서 영아 귀신, 총각 귀신, 처녀 귀신, 시어머니 귀신, 며느리 귀신, 시누이 귀신, 조상 귀신 등등 하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살아 있는 사람에 붙어서 그 사람을 미치게 하거나 병들게 하고, 때로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비명횡사하게 한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로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며,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냐를 불문하고 이런 잘못된 말에 미혹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를 들어 물에 빠져 죽은 총각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죽은 총각의 영혼이 아니라 그 총각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귀신이 그 총각의 영혼인 것처럼 위장하여 행세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속게 되는 것이다. 또 조상 귀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아이가 머리가 아픈 경우 점쟁이들은 종종 조상 귀신이 그 아이를 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조상 귀신이 정말로 그 조상의 영혼이라면 자기의 후손을 아프게 하겠는가?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조상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조상의 영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인 못된 귀신이 그 조상의 영혼인 양 행세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2) 영적 존재는 분명히 실재하는 존재이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고,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된다.

5.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하여

    불신자들은 물론 기독교 신자들조차도 종종 "나의 종교가 중요한 만큼, 남의 종교도 중요하므로 남의 종교도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속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진리는 오류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즉 진리는 진리이고 오류는 오류이므로,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오류를 진리라고 인정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과학을 배워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진리를 알게 된 자는, '에너지를 넣지 않고도 영구히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기관(이것을 '영구 기관'이라 함)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오류임을 알고 있으므로, 영구 기관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서 영구 기관을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말도 맞다고 인정해 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무엇이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식의 덕담아닌 덕담을 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사람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알려 줌으로써 그 사람이 헛수고를 하지 않도록 도와 주는 것이 참사랑인 것이다. 같은 이치로, '피조물이며 죄인인 우리 인간이 죄사함을 받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길이 있다고 하는 오류를 맞다고 인정해 줄 수 있겠는가? 덧붙여서 한 가지 더 언급해 두고자 한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신자들에게 자기만 섬기라고 하니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되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위와 유사하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기독교의 하느님만이 진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진짜 아버지(생부)가 자기의 친자녀들에게 자기만이 아버지라고 가르치지 않겠는가? 자기만이 진짜 아버지라고 가르치는 아버지가 이기적인가? 진짜 남편인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나 외의 다른 사람을 남편으로 여겨도 좋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아내에게 자기만을 남편으로 여기라고 하는 진짜 남편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또 제대로 된 진짜 왕이라면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역적들이나 역적들의 괴수를 섬겨도 좋다고 관용 아닌 관용을 베풀겠는가?

6. 원초적 질문들에 대한 고찰

  제1문: 하느님께서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계시는가?

  흔히들 "하느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항상 영원히 계신다."라고 하지만, 여기서 더 깊이 생각해 볼 점은 '영원 전부터 항상 영원히' 라는 표현이 '시간'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바, 시간마저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항상 영원히 계실 뿐만 아니라 시간 자체를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다. 더욱이 시간을 초월한 상태, 즉 시간이 아예 없거나 영원한 시간을 벗어난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그러면 곧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질문 하나를 던지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언제 시간을 창조하셨는가?

  제2문: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하느님께서는 무소부재, 즉 온 우주 공간에 편재하신다."라고 하지만, 여기서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이 표현이 '공간'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바, 공간마저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 공간에 편재하실 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를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다. 공간을 초월한 상태, 즉 우주 공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빈 공간마저도 없는 상태 또는 무한한 공간을 벗어난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그러면 곧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 하나 더 있다. 하느님께서 어디서 공간을 창조하셨는가?

(참고) 하느님께서는 공간적으로는 무소부재하시지만, 불신자의 마음 속에는 안 계신다.(롬 8 : 9 참조)

  제3문: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존재하시게 되었는가?

  하느님께서는 '자존자', 즉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고, 그 누구나 그 무엇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시다. 여기서도 고약한 질문 하나를 만들어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당신을 창조하셨는가?

  제4문: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선하시고 지극히 의로우시며, 무한한 위엄과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제5문: 하느님께서는 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제6문: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에 대하여 어떤 권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창조주로서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롬 9 : 21 참조)

  제7문: 하느님께서는 왜 일부 천사들의 타락과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허용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특히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것을 허용하셨다.(롬 9 : 22-23 참조)

  제8문: 그러면 하느님께서 죄악의 창시자가 되시지 않는가?

  이 문제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신을 믿는 여타 종교에서도 당면하게 되는 교리적 문제인데,  얼핏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모든 천사들과 아담과 하와를 절대로 범죄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되고, 결국 하느님께서 죄악의 창시자가 되시는 것으로 잘못 추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물에 대하여 창조주로서 인간의 선악을 심판하시는 심판주 하느님을 감히 정죄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단정하고 힐난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정죄까지는 안 한다손 치더라도,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내가 천지(천사와 인간을 포함)를 창조했더라면, 하느님보다 더 지혜롭게 잘 창조했을 텐데."라고 자기의 지혜를 뽐내고, 하느님의 지혜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위의 잘못된 추론에 이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지혜와 이해력이 부족하고 본성이 부패한 인간이 그 사고의 한계를 드러낸 것을 말해 줄 따름이다. 왜냐 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지극히 선하심과 한없는 사랑에 기인하여,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절대주권적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실수하시거나 잘못하시는 경우는 있을 수 없고,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은 완벽하고 지극히 선할 뿐이기 때문이다.

(참고 1) 필자는 제1~3문에서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였고, 제8문에서 유한하고 본성이 부패한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성경)과 그에 대한 성령님의 조명을 배제하고서, 논리만을 좇게 되면 아주 잘못된 추론에 빠질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합리적 사유나 논리적 추론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조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용되어야만 안전한 것이다. 즉, 논리적 추론의 결과가 하느님의 말씀에 배치될 경우, 그 추론은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비록 담벽이나 철조망은 없지만, 인간의 이성적 사유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안에 갇혀 있고, 논리의 속임수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에 있음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

(참고 2) 일부 신학자들 중에 '예정론'을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죄악의 창시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에 명백히 계시되어 있는 예정'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 문제는 '예정론'에서는 물론, '창조론'에서도 만나게 되는 문제임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유한하고 본성이 부패한 인간의 논리적 사고 체계와 과정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창조론'과 '예정론'을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인간 이성이나 논리를 더 중시하는 중대한 오류이다. 아울러, 성경적인 '예정론'과 잘못된 '숙명론(설)'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음도 지적해 둔다.

  제9문: 하느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여기서 가죽옷은 짐승을 죽여야만 만들 수 있는 바, 이는 장차 보내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을 예표한다. 이것을 '원시 복음'이라 한다.

  제10문: 하느님께서는 범죄한 뱀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또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뱀은 사단을 의미하며, 이 말씀은 사단의 공격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사단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계시하신 것이다.

7. 'TULIP'에 대하여

   'TULIP'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에 관한 중요 교리 중 5가지, 즉  i) 인간의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또는 '전적 무능력' (Total Inability), ii) 하느님의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iii)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iv)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v)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의 영문 첫글자를 따서 만든 준말인데, 이것을 '칼뱅 주의의 5대 강령'이라 한다. 이 5가지 교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먼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5가지 교리를 '칼뱅 주의의 5대 강령'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칼뱅이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교리를 정리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5가지 교리가 정리되기 전에 아르미니우스(Arminius)라는 신학자가 이에 거의 정반대가 되는 5가지 잘못된 주장(이것을 '아르미니언 주의의 5대 강령'이라고 함)을 하였고, 이 잘못된 주장을 물리치기 위하여 성경에 계시된 올바른 교리를 정리하다 보니, 역시 5가지로 정리가 된 것이다. 이 때 칼뱅이 쓴 <기독교 강요>란 책의 내용이 많이 참조되었고, 그래서 '아르미니언 주의의 5대 강령'이란 말에 반하여, '칼뱅 주의의 5대 강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칼뱅 주의 신학의 전부가 아니라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5가지, 즉  i) 인간의 '부분적 부패' 또는 '자유 의지', ii) 하느님의 '조건적 선택', iii) '일반적 속죄', iv) '저항할 수 있는 은혜', v) '성도의 궁극적 타락 가능성'으로 요약할 수 있음을 일러둔다. 그러면 이제 'TULIP'에 대하여 하나 하나 살펴 보면서, 아울러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도 살펴 보기로 한다.

7.1 인간의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또는 '전적 무능력' (Total Inability)

    우리 인간의 원조이신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께서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심으로 인하여, 그 분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그 본성이 부패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유리되어, 하느님 보시기에 악(이를 '절대악'이라 함)만 행하게 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의지가 절대악의 영역 안에 갇혀 있고, 그래서 그 안에서만 자유롭다는 말이 된다. 이 경우의 의지를 '속박된 의지'라 한다. 반면에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경우에는 절대악의 영역과 절대선의 영역 모두에서 행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의지가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 의지'라 한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즉, 인간이 태어나서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절대선은 조금도 행하지 못하고, 절대악만 일삼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진리는 성경에 명백히 계시되어 있다. 많은 성경 귀절들 중 몇 개만 열거해 보기로 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 : 5)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창 8 : 21)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 14 : 4)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 58 : 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렘 13 : 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 : 9)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 : 16-18)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 :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 : 3)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 : 23)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 11 : 6)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인간 스스로는 절대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전적 무능력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듣거나 성경을 읽어도, 성령님의 사역이 없으면, 자기 스스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느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 : 12)   "육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 : 14)   "'나(예수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 : 44)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 : 65)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이)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 3)

(참고 1) 원죄를 타고 태어난 우리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즉 육에 속한 사람은 모두 의지가 죄악에 억눌려 있어서, 다시 말해 자유 의지가 없어서, 복음을 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기는 하였으나 전적으로 부패하지는 않았으므로, 즉 자유 의지가 있으므로, 복음을 듣고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 사람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서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보충 : 성경만 있으면, 성령님의 사역이 없어도, 인간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알 수 있다고 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 인간은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안 열 수도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얼핏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면, 아르미니우스의 주장도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은 불신자가 최초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경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므로 곡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참고 2) 사람은 크게는 2부류로, 작게는 3부류로 구별되는데,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하느님께로서 난 자'라 한다. 하느님께로서 난 자('구원 받은 성도')들 중에는 아직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육신에 속한 자'와 영적으로 성숙한 '신령한 자'가 있다. (요 3 : 3-5, 요일 3 : 9, 고전 3 : 1 참조)

7.2 하느님의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찬송하리로다!  하느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 : 3-6)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창세 전에 친히 선택하신 점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하느님의 선택의 근거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하느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또한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 : 29-30)  이 말씀에서 '미리 아신 자들'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는데, 아르미니언 주의나 웨슬리언 주의 등 인본 주의 신학에서는 이 '미리 아심'의 내용이 그 사람이 복음을 믿을 것을 미리 아신 것으로 해석하고,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 사람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 복음을 믿을지 안 믿을지를 미리 아시고, 그 미리 아신 정보에 근거하여 믿을 자들을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들은 인간 편에서 하느님께 '믿음'을 먼저 드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하느님께로부터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얼핏 그럴 듯하게 보이나, 찬찬히 따져 보면, 이 주장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곧 알 수 있다. 첫째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사람, 즉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으므로 자유 의지로 복음을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위의 주장은 그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 왜냐 하면, 육에 속한 그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고 또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다음의 말씀들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위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의 성민이라. 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 : 6-7)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느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 : 27-2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느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 2 : 5)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느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 : 10-13)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음이라." (롬 9 : 15-16)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롬 10 : 20)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 : 16)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 : 9)  이상의 말씀들을 상고해 보면, 하느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택하심은 오직 하느님의 뜻, 즉 무조건적인 사랑과 절대 주권적인 기뻐하심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참고 1) 하느님께서 누구를 '아신다' 하심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미리 아심을 지식적인 것으로 보더라도 그 내용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굳이 짐작해 보자면, 그들이 복음을 믿거나 무슨 선행을 할 것, 다시 말해 그들이 장차 이룰 어떤 공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이 처하게 될 비참한 처지 내지는 부족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참고 2) '믿을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고, 그 믿음이 선행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것이 겉보기로는 믿는 사람의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 : 8-9)  이 말씀에서 '이것'을 아르미니언 주의에서는 '믿음'으로 보지 않고, '구원'으로 보고서, 사람이 믿음을 하느님께 드리고,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주장임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위의 말씀에서 '이것'이 '구원'이 아니라 '믿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느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 1 : 1)  이 말씀에서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명백히 계시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더 이상의 논란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성경 시간에 있었던 일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선생님께서 '이신칭의'의 교리, 즉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이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라는 교리를 설명하실 때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서는 선생님에게 대뜸, "선생님, 그렇더라도 최소한 그 사람이 믿은 것 그 자체는 행위이지 않습니까?"라고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 때 당황해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믿음이 행위가 아니고, 하느님의 선물인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어찌할꼬?

7.3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 : 20-21)  이 말씀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자기 백성을'이라는 문구이다. 예수님께서는 만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 백성(택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흔히들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막연히,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므로,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 모두를 구원하시기 원하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다음 말씀을 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 : 14-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은 택자들에게는 사랑의 하느님이시지만, 유기자들에게는 공의(진노)의 하느님이시다. (참고 : 일반 은총은 유기자들에게도 베푸신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는 사랑을 베푸셨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을 하셨다. 모세에게는 사랑을, 바로에게는 진노를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셨지만, 일부 바리새인들에게는 진노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 : 34)  이 때,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사랑으로써 좋게 권면하지 않으시고, 추상같은 말씀으로 정죄하셨다. 또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열 한 분은 사도로 삼으셨지만, 가룟 유다만은 제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 뿐만 아니라, 다음 말씀을 보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 : 10-11)  이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 : 44)  "'하느님께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 : 4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사랑하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 : 26-27)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 18 : 9-10)  "만일 하느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긍휼의)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 : 22-24)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 : 28-2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 : 19)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느님께 속하였으니, 하느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3 : 5-6)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 : 37-39)  "'내(예수님)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 : 9)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살후 3 : 2)  이상의 말씀들을 상고해 보면,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하느님께로서 난 자, 하느님께 속한 자, 하느님을 아는 자, 성령(님)을 따라 난 자, 약속의 자녀, 긍휼의 그릇,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내 양' 또는 '내 백성')들그렇지 않은 자(마귀에게서 난 자, 독사의 자식,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자, 세상에 속한 자, 육체를 따라 난 자, 진노의 그릇,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내 양이 아닌 자')들이 있음이 분명하고,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하늘로부터 오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예수님께서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예수님께서 만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지 않은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시겠는가? 다음 말씀들을 보라.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사 14 :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사 14 : 27)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사 46 : 10)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내가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사 46 : 11)  이와 같이, 의지가 확고 부동하며, 능력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어서, 마귀에게서 난 자들을 빼앗지 못하시겠는가?

(참고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세상' 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게 하는 몇몇 성구들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게 하는 성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 : 9)  이 말씀을 상고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각 사람에게 비취게 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다. 다음 말씀들을 보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 : 10)  "하느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느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 : 21)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 : 4)  즉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이 세상 신(사단)이 가리고 있어서,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그 빛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중생한 택자(하느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그 빛을 알아서, 구원받도록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정리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택자들만을, 그리고 택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며, 구원하시는 방법은 복음의 빛이 온 세상에 두루 비취게 하시되,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에 대하여, 그 빛을 가리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성령님의 역사로, 택자들에 한하여 선택적으로 제거해 주심으로써, 그들만이 구원받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성구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 : 29)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느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 : 16-17)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예수님)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요 4 : 42)  "이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 : 19)  "저(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 : 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요일 4 : 14)  이상의 성구들에서 '세상'이란 단어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세상'의 의미를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 보면, 하느님의 말씀끼리 서로 충돌하여 모순에 빠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앞에서 살펴본 여러 말씀들과 서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는데, 실상은 세상의 일부분(불신자들)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란 말의 의미를,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유대인들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의 세상으로 보아야 하고, 나아가서는 온 세상 속에 섞여서 살고 있는 구원의 대상인 택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모든 택자들의 세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 : 1)  이 말씀에서 '천하로 다'를 '온 세계 사람 모두 다'로 보아서는 안되고, '로마 제국과 그 식민지들 안에 사는 사람 모두 다'로 보아야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믿는 자마다'라는 말은, 구원이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종(유대인 / 헬라인 / 다른 이방인)에 관계없이, 뿐만 아니라, 문화 수준(문화인 / 야만인)이나 신분(자유인 / 종) 또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지적해 둔다. 이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게 하는 성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 : 14-15)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느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딤전 2 : 4-6)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 : 9)  이상의 말씀들에서 '모든 사람'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 : 9)  이 말씀을 '택자들 중에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늦추시면서, 오래 참으신다는 의미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오래 참으시는 것으로 해석하면, 하느님께서는 다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오래 참으시는데, 하느님께서 오래 참으시면 오래 참으실수록,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반면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되니, 정말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참고 2) 성탄도 구원에 관한 한, 택자들만을 위한 것임이 분명한데, 성탄절에 일부 불신자들이 덩달아 흥청거리고 노는 모습은 참으로 고약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7.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우리의 육신의 출생 과정을 생각해 보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을 자기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태어나고 아니 태어나고를 자기의 의사로 결정할 수 없고, 단지 전적으로 피동적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즉 육에 속한 우리를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는 중생의 과정에 있어서도, 우리는 전적으로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출생 전의 아기가 자기의 잉태를 거부할 수 없듯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성령님의 중생 사역을 거부할 수 없고, 그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의식 이전의 역사'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 안에 영원한 영적 생명(영생)이 재창조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육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느님께로서 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악에 억눌려 있던 우리의 의지도 회복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 의지가 없던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은혜를 입고 난 이후에라야 비로소, 우리는 전에 알지 못하던 하느님을 알게 되고, 자기가 하느님과 유리된 죄인이었음도 깨닫게 되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깨달아지고, 사죄의 은총과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 그리고 영생이 믿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중생의 은혜는 하느님의 절대주권적인 사랑에 기인하는 무조건적인 선택과 예정에 기초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에,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주어지기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 : 17-18)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 6 : 15)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느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 : 10)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 : 18)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 : 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 : 1)  "긍휼에 풍성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엡 2 : 4-5)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느님이 그(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 : 13)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행 5 : 3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느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 : 1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 : 48)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 16 : 14)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 : 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느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 : 17-18)  "또 아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느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5 : 20)  "'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0 : 6)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자는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 : 4)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 : 26-27)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하느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하여금)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딤후 2 : 25-26)  이와 같이 처음에 거역하던 자도, 하느님께서 회개함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뜻을 좇게 하시면, 아무리 고집이 세고,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자라도 그 마음이 바뀌게 되는 바, 그렇게 된 연후에는 자진하여 하느님의 뜻을 좇게 되는 것이다.

(참고)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키기 전에, 먼저 전도 등을 통하여,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이것을 '외적 부르심'이라 한다. 그리고 외적 부르심은 거부할 수 있고, 이는 전도를 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반면에,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기 위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부르시는 것을 '내적 부르심' 또는 '유효한 부르심'이라 하며, 내적 부르심은 택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혜로서, 이에는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7.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하여, 하느님께서는 일부 사람들을 미리 아시고(사랑하시고), 구원하실 자로 선택하시고, 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는 바, 이 은혜를 입은 자('택자')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얼핏 미련해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외적 부르심을 입은 이후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에, 성령님의 내적 부르심을 입고서 거듭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하느님께로서 난 자' 또는 '성도'라 한다. 성도들은 거듭난 이후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로소 복음('십자가의 도')을 깨달아 회심하고, 하느님께로부터 구원 얻는 믿음을 받아 소유하게 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칭의)'을 입은 이후에 '성화'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구원받은(영생을 소유한) 성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다소간 기복이 있기는 하지만, 성령님의 보호하심(지키심)과 인도하심을 입어, 최후 죽음('영화')의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참고 견디게('견인'하게) 된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다음의 성구들에 명백히 계시되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밥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술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 : 1-6)  "이 하느님은 영영히 우리 하느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 : 14)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께로다!" (시 57 : 2)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 73 : 24)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94 : 12-14)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 : 5-8)  "저(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구원)하시리로다!" (시 130 : 8)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구원)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느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사 43 : 1-3)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사 46 : 3-4)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8 : 9-11)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 : 15)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4 : 1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렘 32 : 40)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 : 12-14)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 : 31-32)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 : 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느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 :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웠)느니라.'" (요 5 : 2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 : 37-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 : 4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사랑하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 : 27-29)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17 : 2)  (참고 : '영생'이란 썩어지지 아니할 씨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문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바, 만약 이것이 잘못하면 없어질 수도 있는 그런 것이라면 애당초에 영생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 17 : 11-12)  (참고 : 예수님의 기도는 다 그대로 이루어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 : 15)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 : 10)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 : 1)  "우리가 알거니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느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또한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 : 28-3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 : 35-39)  "만일 하느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긍휼의)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 : 22-24)  "저(엘리야)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 : 4-5)  "하느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 : 29)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느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 : 8-9)  "사람이 감당할 시험(유혹)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느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유혹)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유혹)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 : 13)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 : 14-15)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 : 17)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느님께서 지으신 집, 곧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 : 1)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 4 : 28-31)  "그(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구원)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 : 13-14)  "하느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 : 30)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 : 6)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 : 3-4)  "평강의 하느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 : 23-24)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 : 3)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 : 1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느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히 6 : 7-9)  "하느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히 6 : 17)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 : 24-2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느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이니,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9 : 14-15)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 : 14)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 : 39)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 : 5)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벧전 5 : 10)  "저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 : 19)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일 2 : 25)  "대저, 하느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 : 4)  "내가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 : 13)  "하느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느님께로서 나신 자(예수 그리스도)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느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느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5 : 18-20)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 1)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하여금)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유 24-25)

(참고 1)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쉽게 말하면, 한 번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받은 성도(하느님의 자녀)에게는 그 구원을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또 천국 가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 함.)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뿐만 아니라, 사후에 누리게 될 영생 복락과 상급을 믿음의 눈으로 미리 바라보게 되므로, 만난을 무릅쓰고 참고 견디면서, 하루 하루 선한 일에 힘쓰게 되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살펴보기로 한다. 병들어 죽게 된 히스기야 왕이 하느님께 회개하면서 눈물로 기도하였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셨는데, 그 때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하였겠는가? 자신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자신의 건강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았겠는가? 애라, 하느님께서 내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그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 믿고서, 독약이라도 마실 정도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겠는가? 덧붙여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심리적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느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신다고 하니, 그 복음을 감지 덕지 받아들이고, 이후로는 구원받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선한 삶을 살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쟁이들은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 하니, 평생토록 죄를 계속 짓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만 믿으면 되겠네." 하면서 복음을 조롱하는 것이다. 전자는 성령의 감화를 받은 반응인 반면에, 후자는, 자기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단의 영향 하에서 보이게 되는 사악한 반응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유발할 수 있는데, 성도라면 마땅히 성령님을 좇아 선한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교리를 곡해하고서, 선한 일에 힘쓰는 하느님의 친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그 본분을 소홀히 할 때에는, 반드시 하느님 아버지의 징계(사랑의 매)가 내려진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느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느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 : 5-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 : 12)  이 말씀에서 '두렵고 떨림으로'란 말은 구원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징계를 두려워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을 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 : 15)

(참고 2) 아르미니언 주의자들이나 웨슬리언 주의자들도 구원의 확신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은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이란 자기가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과 현재까지 구원의 대열에서 탈락하지 않은 것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남은 생애 동안에 잘못하면 구원의 대열에서 탈락하여 영벌에 처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에, 궁극적인 구원은 사실상 확신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혼동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해 둔다.

(참고 3) '성도의 견인'의 교리와 배치되는 것같이 여겨지는 성구들이 더러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얼핏 생각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잘 믿다가, 즉 구원받았다가 도중에 멸망의 길로 떨어진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지만, 유다는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그저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만 한 것이 분명하다. 다음을 보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눅 13 : 9-1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 열한 제자는 이미 중생의 씻음으로 깨끗해졌지만, 유다만은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음으로 사울 왕의 경우에는 그에게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사실이나, 사울 왕에게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사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으로서, 불순종의 죄를 범한 사울 왕을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님이 도중에 사울 왕을 떠나셨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윗 왕의 경우나 솔로몬 왕의 경우에는 하느님께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는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서 구원하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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